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영화 들어가기-성경 골로새서 2:8 말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온전히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고 그 행태를 닮고 마음으로 믿어가는 과정인데 뉴스나 SNS, 하다못해 연애 프로그램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름을 들고 나와 다소 황당한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최근에는 나는 솔로 11기 순자 님이 그런 것처럼. 본인의 믿음을 보여주려는 건지 그게 자연스러운 건지 나는 아직 모르지만 확실히 좋은 방향은 아닌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잠깐의 구설수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들은 드러나지 않게 거짓된 말들과 속임수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어릴 적 <도가니>란 작품을 책으로 먼저 본 적이 있다. 어린아이들을 위해 지어진 시설에서 그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일에 대해 충격을 받고 나는 울었던 적이 있다. 이 작품도 그렇다. 우는 것조차 하찮게 느껴질 만큼 괴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밖에서 안으로.. 영화 <더 원더>를 리뷰해 본다.
영화 정보
더 원더(The Wonder)
범죄/영국, 아일랜드/108분
15세 관람가
2022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
줄거리
어느 날 한 위원 회의 요청에 따라 한 아이를 관찰하러 온 간호사 엘리자베스, 그녀는 한 수녀와 교대로 특별하다는 아이 애나를 2주간 관찰하기로 한다. 애나의 특별함은 바로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몇 달을 살아있다는 것. 엘리자베스는 애나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고 몸 또한 관찰한다. 그러나 수녀와 교대하며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봄에도 어떠한 것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는 혼란에 빠진다.
오로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는다는 애나. 하지만 더 이상 가족마저도 그녀에게 접근하게 하지 못하게 하자 급속도로 마르고 병까지 걸리는 것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차츰 애나가 가진 비밀들을 알게 된다. 엄청난 충격에 그녀는 위원회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며 애나를 구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위원회는 그녀를 믿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애나가 성스러운 아이 인지만은 유지할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엘리자베스는 애나를 찾아가 모든 것에 대한 비밀을 듣고 큰 괴로움에 빠진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기자 윌에게 요청하며 애나를 구해내려 하는데..
결말&해석&리뷰
애나를 찾아가 결국 애나는 애나와 가족들이 원했던 죽음을 맞이한 것이며 애나는 다시 그녀와 장난스레 얘기했던 낸 이라는 아이로 태어날 것임을 애나에게 말한다. 애나도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고 엘리자베스는 가족이 없는 틈을 타 애나를 특별한 샘으로 데려가 정신적으로 낸 이라는 아이로 태어나게 도와준다. 그리고 집에 불을 질러 모든 흔적을 지우고 위원회를 속인다. 결국 그녀는 그 마을을 떠나고 살아있는 애나를 만나 윌과 함께 떠나며 결말을 맺는다.
해석을 먼저 해보자면 여기서 애나와 애나를 돕는 윌과 엘리자베스는 모두 안, 즉 갇힘을 의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밖이라는 벗어남을 원한다. 애나는 강한 믿음으로 세뇌되어 있지만 그녀도 이게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고 또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괴로워하고 있다.
기자 윌 또한 같다. 그는 자세히 나오거나 괴로움을 토로하진 못하지만 그 또한 기근에 가족이 끔찍하게 죽었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를 잃은 것에서 갇혀 살아가고 있다. 매일 아이를 위해 만들었던 양말을 품고 다니며 약을 먹어야 잠에든다. 이렇게 셋은 모두 정신적으로 고립된 채 살아간다.
아이러니한 건 애나를 고통으로 만든 가족도 그리고 애나를 구해준 엘리자베스의 행동도 모두 사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 모티브가 중요해도 방향이 잘못됐다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더 영화를 보기 어려웠던 건 여기 나오는 모든 이들이 그 잘못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잘못된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로하며 잘못되지 않았다고 속여가며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튼 다시 해석으로 돌아와서 윌과 함께 애나를 구해주며 셋 다 구원을 받는다. 애나는 불을 붙이기 전 아이의 양말을 그곳에 두고 약을 밟아버리면서, 월은 가족을 구하지 못했음을 애나를 구하고 엘리자베스와 함께 가족을 만들면서, 애나는 자신 때문이라는 거짓된 죄책감과 고통만을 안겨주는 거짓된 가족에서 구원을 받는다.
기독교인으로 마음이 아픈 결말일 수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구원을 일으키는 인물인 엘리자베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믿음이 없고 진실만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가 애나를 구한 바탕이 사랑이라는(인류애적, 보편적인) 것은 마음에 강하게 와닿는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평생을 악을 저지르며 살아온 예배만 다니는 기독교인과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평생 사랑으로 타인을 도우며 살아온 사람(물론 기독교인은 그냥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말씀을 행동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아무튼 둘 중에서는 뒤의 사람이 더 천국에 가깝지 않을까. 이 영화는 말해주고 있다.
영화 구조에 대한 해석을 보면 이 작품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온다. 엘리자베스가 애나를 구하는 것과 똑같다. 세트장을 비춰주고 영화로 들어갔다가 다시 세트장을 비춘다. 윌이 전해준 새가 그려진 소마트로프도 같다. 하나는 새장에 하나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그려져 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에서 안이라는 부정적 구조(애나가 갇힌 집, 보자기로 싸여진 양말, 윌의 가족이 죽은 집)에서 벗어나 밖(세트장, 샘, 배를 타고 떠남)을 추구해야 함을 보여준다.
즉 내면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자신과 상황 그리고 타인을 좀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사랑과 온전한 믿음의 방향으로 살아가라는 게 영화 구조와 내용에 대한 주제 아닐까.
세트장에서 나온 애나의 어머니 역할의 배우를 보며 우리는 모두 하나의 극본의 주인공인 동시에 관찰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극에는 이야기가 있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겪고(안) 또한 바꿔나갈 수(밖) 있음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여러모로 강렬한 영화였다.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소재를 배우들과 배경들이 완벽히 담아낸 작품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에 이런 퀄리티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상당한 작품이었다.
In, Out, In, Out, In, Out
안과 밖 당신은 어디에 서서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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