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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전 떠들기
어머니와 딸, 얼마 전 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가족 간의 관계를 조명한 작품이었고 그중에서도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받았던 상처들과 그 안에서 잊고 있었던 모녀간의 사랑과 이해를 담은 작품이었다. 아슬아슬하면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한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지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이 작품도 모녀간의 관계를 나타낸 작품이다. 신기하게도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상당히 직관적이다. 사랑이 넘치거나 무관심한듯 보이거나 일방적인 관계. 그러나 모녀는 다르다 끊어질 것 같은 얇은 실 위에서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게 감정들이 휘몰아친다. 이 작품도 그렇다. 너무나 고요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감정들이 꽤나 강렬하고 날카롭다. 모녀의 증오와 사랑 그리고 휴식을 담은 영화 <일요일의 병>을 리뷰해 본다.
영화 정보
일요일의 병
드라마/스페인/113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7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놉시스
간략한 줄거리
-버려진 아이와 다시 만난 엄마
어느 날 부유한 사교계 모임을 하던 나이 든 여인 아나벨 앞에 딸 키아라가 나타난다. 다소 거 친행색과 말투에서 아나벨은 자신의 딸이 평탄하게 살아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키아라는 아나벨에게 쪽지를 남겨 카페에서 마주하게 된다. 키아라는 아나벨에게 자신과 10일만 같이 지내자고 말하고 아나벨은 키아라가 자신과의 관계를 끊는 것으로 이를 동의한다. 10일이라는 짧은 기간을 요청한 것과 달리 키아라는 자신에게 큰 요구나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따로 보낸다.
8살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복수라 생각하기에는 공격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어머니의 사랑을 바란다기에는 크게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며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고 묵혀있던 마음들을 아주 미세하게 떨어뜨리는 도중 아나벨은 키아라가 병들었고 얼마 후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키아라도 아나벨이 자신의 상태를 아는 것을 알게 되고 아나벨이 어머니 역할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키아라는 자신의 인생을 건 한 가지를 부탁하는데..
결말 및 해석, 리뷰
-휴식과 죽음
키아라는 아나벨에게 자신을 죽여달라 안락사할 수 있도록 요청하지만 아나벨은 그 말을 듣고 키아라를 떠나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전 남편을 만나 키아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결국은 다시 키아라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거의 다 죽어가는 키아라를 데리고 호숫가로 가 그녀의 죽음을 돕고 그녀가 살던 집을 바라보며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생각보다 강렬한 작품이었다. 단순히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 초반부터 병을 알게된 후 그려지는 한국의 신파를 넘어선 중반 그리고 가족이라는 주제위에 그려진 죽음에 대한 선택에 대한 이야기까지 굉장히 광범위하면서도 동시에 담담히 표현한 좋은 작품이였다.
이제 영화를 분석해 보면 스토리자체는 단순하다 가족을 버리고 성공을 위해 떠난 어머니를 수십 년 만에 찾아온 딸, 함께 살며 딸과 어머니의 관계가 다시 돌아오고 딸은 죽음을 기다리지 못해 어머니에게 자신의 죽음을 도와달라 요청한다. 어머니는 거절하지만 결국 그녀의 뜻을 존중해 주고 딸의 죽음을 도와준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많은 감정선들이 교차하고 조용한 화면이지만 점차 그 폭풍은 강해진다.
원하는 게 뭐니?
아나벨의 질문 처음과 끝의 의미가 다르다.
처음에 아나벨은 단순히 그녀가 신경 쓰인다. 아이를 버리고 떠난 비정한 어머니라는 것이 자신의 사교모임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퍼질까 키아라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 사랑이나 모성애가 아닌 그저 불편한 진실들과 타인의 눈초리를 벗어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며 아나벨은 달라진다. 오히려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을 달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키아라는 점차 딸로 인식되게 된다. 그리고 아나벨은 키아라의 엄마가 되어간다. 영화 초반 부 자신이 낳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다른 딸이 나오는데 아나벨은 그녀 또한 불편해한다. 그렇기에 다른 나라로 대학을 보내는 것이다. 이미 그녀에게 딸은 자신이 집을 버리고 나올 때부터 고통의 대상이었으니.
원하는 게 뭐니 널 돕고 싶어서 그래
어머니가 되어 딸에게 하는 아나벨의 질문
하지만 뼈와 살에 새겨진 어머니라는 존재의 의미는 결코 지워질 수 없다. 결국 아나벨은 키아라의 소통하며 모성애를 회복하고 진심으로 딸의 마음을 듣기 위해 질문한다. 그리고 그녀는 충격적인 답을 듣고 떠난다. 바로 자신을 죽여달라는 딸의 요구.
하지만 전남편을 만나 아나벨은 대화하며 생각을 바꾼다. 남편도 해줄 수 없었던 일을 자신에게 부탁한 것. 그리고 자신이 아니면 키아라를 도와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음을 느끼고 그녀의 휴식을 도우려 한다.
누구나 쉴 자격이 있어
전남편 마티외의 대사
그렇게 그녀는 다시 아나벨을 찾아간다. 죽음의 문턱까지 와있는 키아라이지만 아직 그 선을 넘지 못하고 그저 고통스러워한다. 그렇기에 아나벨은 그녀를 데리고 호수로 가 그녀와 딸의 옷을 전부 벗긴다. 그리고 마치 품에 안은 아이처럼 그녀를 안아 들고 안정시킨 뒤 키아라의 죽음을 돕는다.
이제 키아라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녀가 정말 원한 것을 무엇이었을까. 아나벨은 단순히 자신의 딸이 알려지면서 본인이 구설수에 오를까 하다가 점차 모성애가 생기는 단순한 변화이다. 그러나 키아라는 다르다. 그녀는 아나벨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며 또다시 딸이 되고 싶지만 반대로 그녀에게 자신을 버린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 수많은 감정이 그녀 안에서 그녀를 괴롭힌다.
10일만 나랑 같이 지내요
키아라의 요구
나는 이 대사에서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느꼈다. 키아라 자신도 사실은 뭘 원하는지 모른다. 그저 아나벨을 가까이 두고 자신의 감정 변화를 보려 한 것일 것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으나 버리고 떠난 복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로 이어진 사이는 끊어낼 수 없는 법 둘은 결국 다시금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키아라의 애증적인 모습은 여기저기 잘 드러난다. 특히나 강아지를 일부러 흙탕물에 담그고 아나벨이 이를 도우면서 자신을 씻겨주도록 한다. 어머니의 애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며 동시에 아나벨에게 물을 뿌리며 그녀를 괴롭힌다.
혼자서 무서웠지? 아무도 널 못 찾을 줄 알았지? 그 구덩이 속에 혼자 남겨질 거라고 말이야.
강아지에게 하지만 아나벨에게 하는 대사
그렇게 키아라는 아나벨과 지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사진과 주변의 것들을 이용해서, 점차 둘은 모녀가 되고 잔을 던져 아나벨에게 피를 흘렸음에도 그녀가 오히려 자신을 안심시키자 더욱 그 모성애를 강하게 느낀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이 바라는 것을 그녀에게 전한다. 그것은 아주 잔인한 복수이기도 하고 둘이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깊은 관계를 다시금 회복한 것임을 보여준다.
키아라의 죽음은 한국신파에 적응한 이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영화 곳곳에도 배치해 놓았다. 특히나 죽어가는 총 맞은 새를 돌로 내리 쳐 죽이는 장면은 키아라가 어떤 식의 결말을 맞을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오래 걸리는 거 못 참잖아
마을에 있는 남자와의 대화
이 대사도 그렇고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자신을 자신이 죽이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도 떠나고 어머니도 자신을 버린 그녀에게 죽음마저 혼자 해야 하는 것은 끔찍한 괴로움이니까. 결국 그녀는 아나벨에게 부탁하고 아나벨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 주며 죽음을 돕는다.
이렇게 키아라와 아나벨의 해석은 끝났고 영화의 요소들의 의미와 제목을 해석해 보면 우선 처음 멈춘듯한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나무는 키아라와 아나벨을 의미한다. 첫 장면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아나벨이 사진을 보다가 환상에 빠져든 순간 그녀는 나무밑에 있는 큰 구멍을 바라본다.
엄마를 이해해요
뭘?
전부 다요
죽기 전 둘의 대화
그리고 키아라도 나무밑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개가 오버랩되며 결국 나무는 서로의 과거였고 그 밑바닥에 있는 구멍에서 서로가 가진 상처와 행동의 이유들을 보여주고 둘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목을 보면 <일요일의 병>이다. 병은 단순히 그녀의 병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여기서 병은 키아라가 가진 아픔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음의 고통은 육체적이지만 그녀가 겪은 것들은 마음에 남아 그녀의 정신까지 괴롭힌다. 어쩌면 이 병이란 단어는 키아라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고통받고 있음을 이중으로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난 가끔 술에 취해 몇 시간이고 여기 앉아 있어. 몇 시간씩 말이야! 8살 때부터 늘 여기 있었다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역설적이게도 키아라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병은 아나벨을 찾는 계기가 되고 이로 인해 정신적인 병을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일요일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였다. 모성애도 아니고 어떤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단어가 아니었기에. 그러나 일요일은 우리에게 안식의 날이다.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휴식으로 쓰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는 안식일이라는 이름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라.
창세기 2장 3절
이 작품에서는 키아라의 죽음을 안식으로 바꿔 일곱째 날, 즉 일요일로 바꿔 나타낸 것이다. 키아라는 8살 이후로 버림받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30년이 훨씬 지나서야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 안식으로 바꾸게 된 것.
이 작품이 안락사에 관한 내용이라 말씀하는 해석들도 많은데. 안락사는 그야말로 안락하게 죽음을 얻는 것이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존엄사에 가깝고 그보다는 죽음을 선택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저 사진엔 통찰력과 주제가 있어. 그리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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