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영화 버닝 리뷰 결말 해석 각자가 품은 불의 이야기

by YB+ 2024. 2. 17.
반응형

Preview

영화 리뷰 전 떠들기

어제 리뷰한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후 선정한 영화 <버닝> 이전부터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들리고 개인적으로도 어느 영화, 어느 캐릭터에 가져다 놓아도 항상 감격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유아인 배우가 나온 것도 큰 이유였다. 흔히 말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랄까. 조태오 역의 회장 아들부터 바보 같기만 한 <소리도 없이>의 태인, 그리고 태인과 닮은 듯 완전히 다른 이 작품의 종수까지 그야말로 모든 걸 아우르는 배우이다. 거기에 왜인지 항상 친근하게 느껴지는 스티븐 연 배우까지 볼 이유는 충분하다.

거기에 이 작품은 N 성향을 가진 나에게 완벽한 영화이다. 개개인이 느끼는 방향대로 수많은 해석과 추측이 가능한 영화. 보는 내내 내 미적 감각과 영화적 메시지를 이것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쉽기만 한 작품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집중해서 본 이 영화 <버닝>을 리뷰해 본다.

영화 정보

버닝(Burning)

미스터리/한국/148분

청소년 관람불가

2018년 개봉

시놉시스

간략한 줄거리

 

-각자의 욕망이 자신을 불태우다.

소설가를 꿈꾸지만 가난한 현실 앞에서 유통 쪽 일을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 종수(유아인), 그는 어느 날 납품을 하는 곳에서 우연히 자신의 고향 친구인 해미(전종서)를 만나게 된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해미, 그녀는 자신이 곧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다며 자신의 집에 와서 고양이 사료를 여행 기간 동안 부탁하고 같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둘은 그 자리에서 눈을 맞아 사랑을 나누고 해미는 떠나버린다. 종수는 그녀의 집에 고양이 사료를 주러 가고 그곳에서 해미를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 뒤 해미는 내일 귀국할 것이라며 종수에게 픽업을 부탁하고 종수는 기쁜 마음으로 공항에 나가지만 해미 옆에는 우연히 아프리카에서 만났다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자신과 달리 매우 부유한 벤, 종수는 해미와 벤 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본다. 그러던 어느 날 파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벤과 해미가 놀러 오고 함께 대마초를 피우게 되고 해미는 옷을 벗고 춤을 추고 이후에 그녀가 잠든 후에 종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러자 벤도 자신이 두 달에 한 번씩 쓸모없고 빈 비닐하우스를 찾아 불태운다고 말한다.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종수는 다음날부터 근처의 비닐하우스를 돌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해미에게 연락이 되질 않기 시작하는데..

결말 및 해석, 리뷰

내 맘대로 떠들기

-욕망의 불은 어디로 향하나

사라진 해미를 찾아 여기저기 둘러보던 종수는 벤의 집 화장실에서 해미에게 자신이 선물해 줬던 시계를 발견하고 심지어 고양이마저도 해미의 고양이 이름으로 부르자 다가와서 안기는 것을 확인한다. 종수는 집에서 나온 뒤 얼마 후 해미의 집으로 가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다시 얼마 후 벤을 만난다. 벤을 만나자마자 종수는 칼로 벤을 찌르고 차에 밀어 넣은 뒤 옷을 다 벗어 차에 넣고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 그리고 알몸으로 다시 차로 올라타 떠나며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이 영화는 무엇을 나타내려 했을까.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나는 각자가 품은 불(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불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일들을 겪으며 부정적인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그들의 몸에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종수는 벤에게 벤은 해미에게 불을 지른다. 여기서 마지막 장면이 종수의 소설을 쓴 이후라 소설 속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소설을 쓴 이후의 모습 아닐까 한다. 사실 해석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조금 궤를 달리할 뿐.

아프리카 부시맨에게 배고픈 사람의 종류가 두 가지가 있대 하나는 배가 고픈 리틀 헝거 하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

해미의 대사

우선 해미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빚을 지고 있으며 불안정한 생활까지 겹치면서 그녀는 삶의 의미를 퇴색시켜 간다. 그래서 생각과 고생 끝에 나온 도피처 아프리카,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삶의 배고픔만을 욕망하는 리틀 헝거가 아닌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친구들 앞에서, 또 대마초를 피운 후에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다. 그녀의 욕망은 오로지 진정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이는 결국 그녀 자신에게 불, 즉 버닝으로 돌아온다. 벤에게 기대어 삶의 의미를 애쓰려 하지만 벤은 그런 여자들을 불태우는 남자이다.

벤의 욕망은 재미이다. 가슴이 뛰는 두근거림. 그것이 그가 욕망하는 단 하나의 가치이다. 그러면서 벤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재미있게 생각하고 말한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이 생각한 것을 창조해 내고 그걸 먹어치운다는 것으로 바꿔 말한다. 그에게 모든 것은 재미를 위한 메타포이고 끊임없이 흥미롭고 가슴이 뛰는 것들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러한 불같은 욕망은 해미와 다른 여자들에게 향한다.

전 재미를 위해선 무엇이든 해요

벤의 대사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말은 영화 전체로 여러 번 생각해 봐도 자신이 만난 여자들에 대한 살인이다. 그가 소유한 박스에 담긴 여러 여성용품들과 종수가 여러 번 찾았지만 아무것도 불태워지지 않은 진짜 비닐하우스로 유추할 수 있다. 벤에게 있어 해미와 다른 여자들은 그의 재미를 위한 욕망의 재물에 불과할 뿐이다. 마치 음식과 같은.

 

그리고 마지막 종수의 욕망은 무엇일까, 벤과 해미는 너무나 명확히 그 욕망을 보여주고 있어서 쉽게 와닿는 반면에 종수는 여러 욕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부모로부터 시작된 애정결핍, 그리고 사회적 성공, 마지막으로 소설까지 그의 욕망들은 다양하나 나는 사회적인 성공에 더욱 욕망이 강렬하지 않나 싶다. 그 장면은 대체로 두 가지로 보인다. 그가 해미와 첫 관계를 할 때 종수는 첫 경험임에도 해미를 바라보지 않고 벽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곳은 바로 하루에 한 번 유일하게 남산타워에 의해 빛이 들어오는 벽이다. 종수는 이미 가난하고 힘든 삶에 지쳐있었고 그것들은 벤을 만나면서 타오르기 시작한다.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아

종수가 해미와 대화 중 벤을 의미하며

그의 평생에 아니 어쩌면 다음 생까지 살아도 얻지 못할 것을 벤은 너무나 쉽게 가진다. 차, 집, 그리고 너무나 화목해 보이는 가족까지. 심지어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해미마저도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갖는다. 종수의 욕망은 점차 비뚤어진 광기가 되어가고 결국은 벤을 죽이고 태우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비닐하우스 이야기에 대한 복수이면서도 자신의 옷을 벗어 알몸으로 차에 올라 운전하는 것으로 그가 자신의 비뚤어진 방향으로 욕망을 성취시키면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보통은 새로 태어남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이 영화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영화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계속해서 남기며 해석을 유도한다. 해미는 과연 살해당할 걸까? 마지막 장면은 소설 속의 상상 아닐까? 등등 여러모로 다양하지만 역시나 이 영화는 개개인이 가진 부적절한 욕망들이 어떻게 강렬히 타오르고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지 보여주는 영화로 보인다. 아 그리고 해미의 우물 이야기와 고양이에 대해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귤이 없다는 것만 잊으면 돼.

팬터마임을 하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해미는 진짜 그저 거짓말쟁이였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해미의 팬터마임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우물은 없었고 고양이는 있었다. 고양이는 그녀의 욕망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종수 또한 고양이의 변을 보는 것으로 고양이는 실제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우물은 그녀의 욕망을 보여준다. 하늘로 올라간 손, 그리고 우물에 빠져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그녀, 모두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녀에게 있어 우물은 그녀가 갇혀있는 삶이고 그것을 구원해 줄 사람으로 벤 이 아닌 종수를 바라본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 삶의 의미는 그녀 곁에 있어줄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제 영화 자체로 돌아와서 보면 영화는 재미있고 또 흥미롭다. 해석에 관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장면 하나하나에 감독의 의도들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음악도 그렇고 장면들 자체도 상당히 신비하면서도 현실적이다. 해미의 춤사위에 걸려있는 태극기와 계속해서 들려오는 대남방송까지,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모습을 가득 담아냈다. 심지어 그 장면들이 하나같이 아름답다.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깊어지는 모습을 담은 것도 흥미롭다. 보통은 사건을 겪으면서 사람이 변해가는 것을 영화들은 주로 보여주는데 이 영화는 그저 깊어지기만 한다. 변화하는 욕망이 아닌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처럼 더 크고 더 뜨겁게 발산한다. 그리고 그 불은 여러 곳으로 번지고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전해진다. 마지막 장면, 불에 타는 포르쉐를 본 관객이라면 이상한 해방감과 동시에 어딘가 답답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영화 제목처럼 <버닝> 그 말 그대로 작은 불과 큰 불로 모든 것을 태워버린 영화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