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더 플랫폼> 해석에 관한 글을 올린 지도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생각보다 오래된 작품의 프리퀄 버전이 등장했는데 1편보다 더 난해하고 어렵게 만들어진 것 같다. 아니면 주제를 꽤나 고상하게 생각해 보려다가 실패한 건지 사실 약간 해석적으로는 중구난방으로 보인다.
1편 <더 플랫폼>은 333층이나 그 안에 살아가는 2명의 인간들 즉 666이 악마의 숫자다 하면서 해석도 가능했지만 나는 시스템 그 자체에 집중해서 작품을 풀어보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번에는 인간이 가진 죄를 어떻게 시스템, 즉 사회 내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쪽으로 해석해 보았다. 1편보다 더 고어해 지고 난해해진 작품 <더 플랫폼 2>를 해석해 본다
더 플랫폼 2 해석 결말
<시스템과 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나>
주인공 페렘푸안은 죄를 가졌다고 생각해 직접 구덩이에 자원한 사람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자신을 용서할 '시간'을 갖는 것. 그렇게 그녀는 플랫폼에 오게 되고 그곳에서 현자라 불리는 이들의 규칙을 따르기 시작한다. 바로 내려오는 음식 중에서 자신이 선택한 음식만 먹고 나머지는 내려가게 만드는 것. 얼핏 보면 아주 평등하고 올바른 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건 바로 인간이란 존재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의 음식만 먹어서는(물론 완전식품을 제외하고는)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시스템에서는 자신이 뭘 정했건 타인이 바꿔주지 않는 한 그것만 먹어야 한다. 모두가 평등하고 온전해지는 길이라는 현자의 법이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유파도 인간에게는 해롭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먹게 되면 밑에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이미 1편에서 본 것처럼 시스템은 그저 존재하고 그 위에 법도 인간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을 망가뜨릴 뿐.
<구원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와중에 주인공은 자신의 죄를 시스템 내에서 잊기를 원한다. 즉 그녀에게는 시스템도, 법도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생각은 점차 바뀐다.
나는 이점이 흥미롭다. 인생이 나락에 갈 것을 알고 들어온 구덩이라는 곳에서 그녀는 점차 시간을 원하는 것이 아닌 죄를 치유하기를 원한다. 즉 잊는 것이 아닌 갚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팔을 잃어버린 복수로, 법 앞에서 지켜주지 못한 동료에게 미안함으로, 때로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모자라 보이는 장애인에 대한 연민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원한 건 처음에는 단순히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진정한 마음은 그녀 자신의 속죄였음이다.
그렇게 그녀는 구덩이 안에서 변해간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성이다. 그녀가 원한 것은 현자파와 자유파 모두에게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음식이 가지만 원하는 음식을 적절히 먹는 것. 즉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유를 말했지만 자신을 공격한 현자파를 먼저 죽이려들지 않았고 죽은 사람들의 인육을 먹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존엄 자체였으니까.
아무튼 시스템은 불완전하고 그 위에 덧씌워진 법도 불안정하다. 결국은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간 것들이니까. 그 안에서 이 작품은 인간성이란 것에 초점을 두었을 때 사람의 마음을 속죄받을 수 있음을 말하는듯하다.
<사회의 구원은 있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의 속죄는 가능하지만 시스템을 벗어나는 것도, 더 나은 삶을 사는 법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 어떤 것들로도 구원은 없다는 게 최종적인 초점으로 보인다.
시간상으로 보면 2편이 1편보다 먼저 발생한 사건이다. 이미 페렘푸안은 먼저 아이를 올려 보냈다. 하지만 1편에서(2편이 먼저 아이를 올려 보낸 뒤 발생한 사건)도 페렘푸안의 남자친구였던 이 가 결국에는 333층 아래로 내려와 아이를 올려보내도 변화는 없다. 즉 시스템과 법이 있는 333층의 구덩이 속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
한 가지 방법은 333층을 벗어나 시스템 밖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도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인간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때때로 즐기는 풍족한 식사와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침대가 없지만 적어도 인간을 구원하는 진정한 자유와 인간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기타 논점 해석>
1. 아이들은 무엇인가
아이들 또한 어른들과 다른 점이 없다는 걸로 보인다. 시스템 내에서도 사실 현자파의 법을 잘 듣고 개인적으로 잘 교환하며 먹으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다 같이 원을 그리면서 소수의 인원들이 순서대로 미끄럼틀을 타는 것과도 동일하다. 하지만 곧이어 그 질서는 깨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음식에 대한 욕망으로 일을 망치지만 아이들은 미끄럼틀을 타는 즐거움에 의해 법을 깨고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즉 아이들도 어른들과 같은 욕망에 이끌리어 시스템을 망치는 존재 들인 것이다.
2. 왜 한 명을 뽑아 333층에다 데려다 놓는가
1에 적은 것과는 살짝 논점이 다를 수도 있지만 해석하기 나름이라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333층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근접한 곳이다. 사실상 시스템도, 법도 있어봐야 의미가 없는 곳. 그곳에서만큼은 가장 중요한 인간성만이 남아있는 곳이고 그나마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가장 그 인간성에 근접하지 않을까. 아니라면 위에서 있는 인간성을 가진 어른 누군가가 그곳에서 아이를 찾아주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까지는 그냥 생각해 본 것이고 여전히 내 생각은 그냥 그 아이를 데려다 놓는 것도 그저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아무 의미 없이 시스템이 정한 대로 데려다 놓은 것이고 그 아이를 굳이 지하로 데려가서 다시 위로 올려 보내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3. 속죄는 이루어졌는가
이게 이 작품의 묘미인듯한데 1편의 주인공과 2편의 주인공 모두 아이를 올려 보내고 자신의 죄를 내려놓은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아이가 올라가서 메시지가 되었는지 그냥 그 관성에 의해 죽었는지, 살아갈지 죽을지 다시 돌려보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시스템 내에서 발악해 봐야 시스템 안에 있을 뿐 밖에서의 상황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한건 그들 자신의 속죄를 위한 그저 요식행위였지 엄청난 속도로 올라가는 플랫폼에 아이를 던져 넣은 것이 그 아이를 죽일 수도 있는 행위일 수도 있음이다. 즉 속죄는 그야말로 자기만족에 가까운 것. 그러므로 진정한 속죄는 없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더 플랫폼 리뷰 결말 해석 시스템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아간다. 24시간 중에 10시간 정도는 출근준비부터 시작해서 퇴근 후 집까지 고생하고 집에 와서는 저녁 먹고 개인 취미생활을 하면 새벽 한두 시이다. 물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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